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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인드

가나의 아픈 역사가 깃든 엘미나성

by goodmind.kr 2022. 12. 20.

엘미나성 (Elmina Castle)
엘미나성 안쪽 마당
노예들이 갇혔던 감옥과 화환

 

황금해안의 역사

아프리카 대륙 서부에 위치한 가나는 1470년 포르투갈 인들이 진출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가나라는 이름은 오늘날 말리공화국에 자리했던 기원전 4~13세기 고대 가나 왕국에서 유래했지만 식민지배 이전의 자료는 별로 남아있지 않다. 

서쪽 해안가 엘미나에 발을 붙인 식민주의자들은 성채를 짓고 금과 노예무역을 시작했다.

18세기 중엽에는 영국, 네덜란드, 덴마크 등 40개국까지 그 수가 늘었으나 식민 열강들의 각축전이 벌어진 결과 1874년 영국이 황금이 생산되는 케이프코스트(Cape Coast) 지역을 식민지로 삼는다.

그리하여 이 지역은 오랫동안 황금해안(골드코스트 Gold Coast)으로 불리게 된다.

1500 ~ 1800년 사이에 채굴된 금의 양은 자그마치 150만 kg이나 되고 금광 한 곳에 동원된 노예의 수는 1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 후 영국 식민 당국은 부족민들의 땅을 국유화(왕실 소유) 하려고 했고 이에 반대하는 추장들을 중심으로 정치운동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것이 서아프리카 민족회의 결성의 계기가 되었고 이는 아프리카 독립의 아버지라 불리는 은쿠루마의 반영 투쟁으로 이어진다. 

 

노예무역의 시작

황금해안 엘미나 지역에는 중세 노예무역으로 악명 높았던 성채가 남아있다.

포르투갈 함대 사령관이던 엘미나는 이 지역을 자신의 이름으로 명명하고 노예를 동원해 성채를 지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흑인 노예들이 중노동으로 쓰러졌고 바다에 던져졌다.

이곳은 점점 황금무역의 거점에서 노예무역의 거점으로 변해갔다.

이곳에 잡혀온 노예들은 화물이나 가축처럼 거래되었고 배에 실려 이국만리로 팔려나갔다.

조금이라도 반항하는 기색이 보이면 학대와 고문을 당했고 강간을 당하고 결박된 채 모기에 뜯기며 죽어 갔다.

성채의 지붕에는 대포들이 입을 벌리고 있고 성벽 주위로는 깊은 해자가 에워싸고 있다.

이곳에 끌려오면 집으로 살아 돌아갈 수 없다. 

 

노예선으로 이어지는 통로

 

No Return Point

노 리턴 포인트라 불리는 문이다. 

이 구멍을 지나 대기 중인 노예선에 오르면 고향을 뒤로하고 다시 돌아설 수 없는 곳으로 영영 떠나게 된다. 

깜깜한 감옥에서 유일하게 밝은 곳, 그곳에 희망은 없었다. 

세월이 흘러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노예들의 후손들이 이곳으로 돌아와 선조들의 아픔을 위로했을 뿐이다. 

 

노예무역 그 후

노예무역이 시작된 지 500여 년이 지났다. 
지난 역사의 아픔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배우고 바로잡았을까?

식민 열강들이 임의로 아프리카 땅에 그어놓은 국경선은 아직까지 민족 종교 언어 문제가 얽힌 복잡한 분쟁을 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가나는 1957년 독립 후 비교적 풍부한 자원과 안정된 정치를 바탕으로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제7대 유엔 사무총장을 지낸 코피 아난이 가나 출신으로 세계인의 인권을 위해 노력했다. 

 

ps.

최근 식민 열강 중 하나인 네덜란드의 총리가 과거 노예무역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를 했다. 

 

지난 수 세기 동안 (네덜란드) 국가와 그 지도부들은 노예제가 가능하게 했고 이로부터 이득을 보았다.
(네덜란드) 정부는 당시 노예가 된 이들과 그 후손들에게 가해진 엄청난 고통에 대한 책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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