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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인드

나는 꼴찌였다.

by goodmind.kr 2022. 11. 21.

박찬석 전 경북대 총장

 

나의 고향은 경남 산청이다.
지금도 비교적 가난한 곳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가정 형편도 안되고 머리도 안되는데도 아들인 나를 대구로 유학을 보냈다.
대구 중학교를 다녔는데 공부가 하기 싫었다.
그 결과는 1학년 여름방학 때 성적표로 나타났다.
1학년 8반, 석차 68/68, 꼴찌를 했다.

부끄러운 성적표를 갖고 고향으로 가는 어린 마음에도 아버지를 생각하면 그 성적표를 내밀 자신이 없었다.

 

당신이 교육을 받지 못한 한을 자식을 통해 풀고자 했는데 꼴찌라니...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하는 소작농을 하면서도 아들을 중학교에 보낼 생각을 한 아버지를 생각하면 그냥 있을 수 없었다.
잉크로 기록된 성적표를 석차 1/68로 고쳐 아버지에게 보여 드렸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보통학교도 다니지 않았으므로 내가 1등으로 고친 성적표를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
대구로 유학한 아들이 집으로 왔으니 친지들이 몰려와 "찬석이는 공부는 잘했더냐?"라고 물었다.

앞으로 봐야제, 이번에는 1등을 했는가베.
명순(아버지)이는 자식 하나는 잘 뒀어, 1등을 했으면 책거리를 해야제.


당시 아버지는 처가살이를 했고 우리 집은 동네에서 가장 가난한 살림이었다.
이튿날 강에서 멱을 감고 돌아오니 아버지는 한 마리뿐인 돼지를 잡아 동네 사람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하고 있었다.
그 돼지는 우리 집 재산목록 1호였다.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아부지... " 하고 불렀지만 다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달려 나갔다.
그 뒤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겁이 난 나는 강으로 가 죽어버리고 싶은 마음에서 물속에서 숨을 안 쉬고 버티기도 했고, 주먹으로 내 머리를 내려치기도 했다.
충격적인 그 사건 이후 나는 달라졌다.
항상 그 일이 머리에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17년 후 나는 대학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나의 아들이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그러니까 내 나이 45살이 되던 날, 부모님 앞에 33년 전의 일을 뒤늦게 사과하기 위해 말을 꺼냈다.

 

어무이, 저 중학교 1학년 때 1등은요......
알고 있었다. 그만해라. 민우(손자)가 듣는다.

 

옆에서 담배를 피우시던 아버지가 정색을 하시며 말씀하셨다.

자식의 위조한 성적표를 알고도 돼지를 잡아 잔치를 하신 부모님의 마음을, 박사이고, 교수이고, 대학 총장인 나는 아직도 감히 물을 수가 없었다.


[출처] 박찬석 전 경북대 총장 일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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