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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인드

아름다운 기업가 정신을 실천한 유일한 박사

by goodmind.kr 2022. 11. 2.

 

1894년 청일전쟁의 싸움터가 된 평양은 순식간에 폐허가 되었고 일본은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을 시작했다.

이듬해 태어난 유일형은 나라에 이바지하는 학자로 자라길 바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어린 나이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독실한 침례교 신자인 태프트 자매의 집에 거하게 된 그는 검소함과 부지런함을 몸으로 익힐 수 있었다.

 

일과 학업을 병행해야 했던 그는 현지인들이 발음하기 어려운 일형 대신 대한제국의 글자를 딴 일한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또한 사업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존경받는 문화 속에서 사농공상 즉 장사를 천하게 여기는 생각을 바꾸게 된다.

그 후 사업을 시작한 그는 만두에 들어가는 숙주나물 통조림을 만들어 크게 성공했지만 그는 안락한 미국 생활을 포기하고 고국에서 새로운 도전을 결심한다. 

그가 본 것은 기생충, 결핵, 학질, 피부병 등으로 고통하는 동포들의 모습이었다.

모두 약만 있으면 고칠 수 있는 병이지만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한 사람들은 오랜 시간 고통을 당하다가 목숨까지 잃고 있었다.

유일한은 의사인 아내를 설득해 서울 종로에 유한양행을 설립한다. 

 

안티푸라민

 

 

유한양행의 심벌 버드나무는 서재필 박사가 민족이 편히 쉴 수 있는 그늘이 되어 달라는 뜻으로 미국을 떠나는 유일한에게 전해준 것이다.

유일한은 '기업은 개인의 것이 아니다.'라는 신념을 실천하기 위해 주식회사로 바꾸고 주식을 사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우리나라 최초로 종업원 지주제와 전문 경영인 제도를 도입했고 사재를 털어 독립운동 및 인재양성에 힘썼다.

 

유한양행은 우리 사원들, 우리나라의 회사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내 가족이나 친척에게 물려줄 수 있겠습니까?
앞으로 유한양행은 전문경영인이 회사를 맡을 것이며 이것은 우리 유한양행의 전통이 될 것입니다.

 

군사정권은 부정부패를 없앤다는 이유로 대대적인 세무조사를 벌였지만 유한양행은 오히려 성실 납세자로 인정되어 표창을 받았다.

조금 벌면 조금 버는 대로, 많이 벌면 많이 버는 대로 철저하게 세금을 냈다.

그것이 국력은 물론 일자리를 만들고 기업이 사회에 기여하는 방법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1순위는 나라였고 교육과 기업, 가정이 그다음이었다.

그는 전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고 사회에 환원하여 우리 사회에 훌륭한 본보기가 되었다.

1995년 자유 독립과 국가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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